Rock is Dead

이번에 biscuit gallery에서는 미토베 나나에(Nanae Mitobe)의 개인전 「Rock is Dead」를 2021년 6월 24일~7월 11일의 회기에 개최합니다.

「Rock」이라는 문화는 지루하고 답답한 세상을 타파하는 에너지의 상징으로서 20세기에 선명한 빛을 남겨왔습니다. 목소리 없는 자의 대변자, 시대에 침을 뱉는 아나키스트, 시대를 변화시키는 혁명가로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고 이끌어온 록스타.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상업화되고 스타덤에 올라간 존재는 스타라는 상품으로 소비되며, 사상은 형해화되고 스타일만 남아갑니다. 이러한 선망과 실망 속에서 「Rock is Dead」라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음악성, 화려한 스타일, 강력한 메시지의 한편으로, 그 존재는 우상화되어 상품으로 소비되어갔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록스타들은 우상화된 자기 자신과 실제의 자신 사이의 좁은 틈에서 모순과 갈등을 안고 노래해왔습니다. 미토베는 이러한 시대의 아이돌들의 모습에 소비와 표현이라는 아트라는 세계를 살아가면서 마주해야 하는 이율배반을 겹쳐놓으면서 신작 제작을 계속해왔습니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받는 시대를 맞이하면서도 여전히 비대해지는 아트 마켓. 그것과 타협하면서 형해화되고 변형되어가는 아트. 이 상황에 환멸을 느낀다고 해도 자본의 원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미토베는 이러한 상황을 부수듯이 물감을 짙게 칠해나갔습니다. 그녀는 「Art is Dead」라는 말을 떠올리며 「Rock Star」를 그려나간 것입니다.

본 전시회에서는 음악·패션·영화 등을 횡단하면서 글램 록 씬의 상징이 된 David Bowie, 도발적인 모습으로 보수적인 여성상을 파괴해나간 여성 록 밴드 The Runaways 등 70년대의 스타를 그린 작품을 발표합니다. 팝하고 화려하며 주의도 주장도 없는 당연스러운 인테리어가 아트로서 마켓을 떠들썩하게 하는 시대. 그러한 상황에 대해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살아온 스타들을 그림으로써 상품으로서의 회화를 타파하려는 시도입니다. 효율성이나 다루기 쉬움을 무시하고 고수해온 초두꺼운 칠하기라는 미토베의 스타일로 그려진 록스타들은 생생한 물감의 냄새를 풍기며 그 무게와 질량을 감싸안고 오늘날의 아트에 안티테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미토베 나나에《Sexy Rock Alien》2mx2m Oil painting,linen,pigment,wood panel 2021

본 전시회에 기고해주신 큐레이터 야마미네 준야 씨의 글입니다.

Rock is Dead/아트가 아름다움을 잃을 때, 그 안티테제로서
야마미네 준야(큐레이터)

자신 안에서 하나 정해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과 사진을 주요 무대로 해온 저는 미술이라는 필드에 있어서 결국 아류의 존재이고 그 주류인 회화는 성역이므로 제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주류에 대한 카운터파트로서 입신함으로써 그 특이성을 자부해왔다는 감각마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미술과 관련한 모든 제도가 회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명확하게 보여지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회화라는 존재를 직시하는 것을 피해왔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미토베 나나에라는 화가를 만난 것은 그럴 무렵이었습니다.

뮤제 하마구치 요우조에서 처음 본 미토베의 작품은 회화라는 영역을 일탈한 물량으로 그것은 도상학적으로는 감득할 수 없는 보통이 아닌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회화보다는 조각에 가까운 량감. 하지만 미토베는 그것을 굳게 회화라고 불렀습니다. 말이 부족하고 귀여운 미토베 본인의 인상과는 달리 철저한 회화 지상주의. 그리고 완고함. 그 집착과 작품에서 풍겨나오는 이상한 압력. 그것이 뇌리에 새겨지면서도 영상 언어와 그 레토릭을 구사하고 보는 자의 심상을 조종하는 맥락주의의 세계에 있던 제 자신과는 상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우라 없는 복제 기술 시대의 예술 속에서 버둥거리던 저 안에서 싹튼 압도적인 아우라에 대한 질투. 그리고 그로 인한 차단. 지금이 되어서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미토베도 또한 아우라에 대한 신뢰를 잊고 콘텍스트를 교묘하게 병합한 레토릭을 최고로 하는 현대 미술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의 유일무이한 무기는 압도적인 물량과 유화의 냄새 그리고 그 존재감으로부터 “회화가 거기에 있다”는 것의 박력을 현전시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황당무계할 정도로 일관되고 어설픈. 하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파고들어간 선에 미토베라는 화가의 본질과 매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토베는 어쩐지 전혀 정반대에 있어야 할 저의 토크나 이벤트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고 열심히 말을 들었습니다. 그 흐름에서 조언을 구해졌습니다. 회화에 대해 코멘트를 구하는 기회가 적었던 저는 꽤 당혹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품 자체가 아무리 훌륭해도 텍스트나 이미지 등의 정보가 선행하는 시대에 즉해서 언어적으로 읽기 쉬운 도상, 작품이 지니는 이야기 그리고 기존의 맥락과 연결하기 위한 걸고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짜내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표면적인 정석을 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미토베의 아틀리에에서 그 작품들을 본 때 자신이 아는 문법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구축된 작품에 자신의 천박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Michael Jackson이나 David Bowie 등 미토베 본인이 끌렸던 인물과 대화하면서 여러 겹으로 겹쳐진 물감이 발산하는 존재감은 말보다도 말을 잘해서 말을 걸어옵니다. 개념적으로 로고스적으로 (요하면 머리만 크게) 미술을 포착하려 해왔던 저에게는 충격적이었고 미술의 하나의 본질적인 측면에 다시 마주했습니다.

그러한 감각을 주었던 미토베가 이번에 선택한 주제가 『Rock is Dead』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Art is Dead」라고 외치고 싶던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시대에 저항하고 그 마찰과 충돌에서 태어나는 빛남으로부터 시대에 빛났던 록스타들에 겹쳐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기분은 아플 정도로 알겠습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본 순간 회화가 빛나 보였다는 미토베. 그녀에게는 마켓에 타협하고 경박하고 노리고 가는 느낌의 작품이 “아트”로서 유입되어온 이 세계가 이제는 빛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게 된 것이겠지요. 거기에는 공감합니다. 그녀와 제가 아름답다고 느껴왔던 것은 각각 다르지만 빛나 보이는 예술이 추방되고 스타일과 양식만을 따라 그린 것이 본류처럼 행동하는 것에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작가의 절절한 외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 그 자체와 작가의 외침이 겹쳐 공명함으로써 예술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잃어가고 있다면 아트는 형해화된 록의 말로와도 같습니다.

한때는 아름다운 것을 예술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까지도 아트라고 불리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뜨리고 싶어 하는 미토베의 안티테제가 작품에 담겨있습니다. 표층적인 기술이나 스타일을 답습한 것은 미디어 수용이 잘되고 다루기 쉬우며 상품화하기 쉽습니다. 거기에 경제 원리가 뒤따르고 그러한 것을 지지하는 파워가 커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될수록 미술이 배양해온 본질적이고 다양하며 깊고 때로는 불안과 두려움을 구동하는 듯한 힘에 매료되어 있던 사람들이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은 정확히 그러한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 속에서도 자신의 표현을 관철하려 하는 인간의 갈등으로부터 아름다움이 태어난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작품에야말로 현상을 타파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싶은 것입니다. 그 버둥거림에서 태어나는 빛남을 감싸안은 존재야말로 예술가일 수 있습니다. 미토베는 그 길을 목표로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또다시 새로운 단계로 발을 들여놓기 위한 문을 열고자 하고 있다고 직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토베의 작품의 두께에는 그녀의 절절한 외침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전시 풍경|1층 플로어
전시 풍경|2층 플로어
전시 풍경|3층 플로어

미토베 나나에 아티스트 코멘트

2016년에 DAVID BOWIE의 부음을 듣고 그 이듬해 일본에서 개최된 대회고전을 보러 갔습니다. 매우 흥분되는 전시회였지만 제 안에 있는 데이비드 보우이는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저는 그림으로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몇 년이 지나 일본의 아트 씬에도 큰 변화가 있었고 제가 신앙해온 예술의 사상에도 영향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의혹 속에서 그의 「나는 우주인이야!」라는 강력한 메시지에 아름다움을 초월한 고유의 존재이기 때문에 저는 그의 존재에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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